대담한 해석과 절정의 기량
박세연의 현대 가야금 음악
미려(美麗)하고, 감각적이고, 세밀하고, 때론 날카롭고, 때론 강렬하게 응축된 힘으로 연주된 현대 가야금 음악을 찾는다면 이 음반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가야금 독주곡집 <금(琴)을 품다>(악당이반, 2012년)에서 현대 음악을 연주하는 독주악기로서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이, 이번엔 2019년 5월에 있었던 독주회 <가야금, 상상의 숲을 거닐다>에서 연주했던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두 번째 음반을 세상에 내놓았다.
현대 음악 작곡가 4인과 함께 고민하며 만들어낸 가야금 창작 음악 5곡이 수록된 이번 음반에는 명주실의 질감과 나무통의 울림이 손톱과 살갗과 맞닿아 발현된 다채로운 음색의 가야금 소리가 담겨있다. 서양음악 작곡으로 시작했지만, 한국음악에 대한 탐구와 사랑으로 이뤄낸 숱한 성과물로 증명한 네 분의 작곡가 작품으로 가득 채운 음반에는 이건용, 임준희, 도널드 리드 워맥, 그리고 토마스 오스본 등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당대 최고 작곡가의 가야금 음악이 햇살을 받은 모래알처럼 신비롭게 반짝인다. 작곡가와 연주자의 아주 잘 맞은 궁합이 가야금의 깊은 농현으로 표현된 현대 가야금 음반의 수작이다.
박세연의 이번 작업은 가야금 음악의 레퍼토리 확장이라는 의미를 넘어, 음악 듣는 내내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작곡가와의 대화와 협업을 통해서 가야금 소리에 매력을 더할 방안을 함께 찾아 상상의 숲을 거닐었고, 결국 몽환적 상상력이 혼재된 ‘신화’나, 문학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정제된 언어 속에서 가야금 음악의 실마리를 풀어냈다. 이렇게 얻은 영감은 작품의 이미지가 되고, 악보가 되고, 음악이 되었다.
이것은 문학작품을 읽을 때 느끼던 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특별함과 같은 경험으로, ‘문장’은 ‘마침표’에 의해 ‘의미’가 달라지고, ‘느낌표’는 움직임의 ‘동기’를 표현한다. 단어가 의미를 잃으면 말의 힘이 사라지지만, 단어에 뜻이 더해지면 의미가 강화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미궁의 음표, 마디마다 매달린 보이지 않는 각주, 결코 쉽게 읽히지 않은 것들이 머릿속을 빽빽하게 만들어 주는 밀도 높은 악보를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가야금을 무릎에 올리고 작은 연습실에서 보낸 지난한 과정을 그녀는 결국 스토리 텔링으로 풀어냈다. 최종적으로 그녀의 손끝을 통해 음표들은 생명력으로 꿈틀하며 소리로 발현되었다. 숲의 나뭇가지에 앉은 새처럼 관찰력이 풍부해진 그녀는 예민한 지각과 세밀한 묘사로 곡마다 이야기를 덧붙여 작곡가의 의도를 자기 것으로 완성했다. 그녀에게 현대 음악은 재미나고 흥미로운 놀이이고 결국은 달콤한 해피엔딩으로 풀어냈다.
박세연의 완벽주의적인 성향과 문학적인 감수성은 대담한 해석과 절정의 기량으로 다섯 곡의 현대 가야금 음악을 경쾌하게 풀어냈다. 그녀는 시도를 넘어 가야금의 다양한 표현력과 예술적인 기교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대단한 집중력이고, 아찔하고 탁월하며 게다가 아름다운 음악으로 완성되었다. 박세연은 이번 음반을 계기로 기교는 물론 뛰어난 음악성뿐 아니라 진정성 있는 연주자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가야금 창작 음악에 문제 의식을 갖고 작곡가들과 오랜 시간 함께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귀하고, 또한 이러한 작업은 가야금 음악의 현주소와 경계를 가로지르는 과정이기에 개인의 성과를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현대 음악으로 작곡된 가야금 음악이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들리는 것은 박세연이 갖고 있는 아주 큰 장점이다.
음악평론가 현경채 Kyungchae, Hyun
<작곡가의 감상평>
이건용 Geon-yong Lee
박세연의 연주는 아름답고 지적이다. <여름 정원에서>는 한여름 정자에 앉아 쉬는 선비를 그리고 있는 음악인데, 박세연은 이를 가야금으로 자연스럽게 잘 표현하고 있다.
토마스오스본 Thomas Osborne
박세연이 녹음한 나의 작품은 고난이도의 테크닉을 요하므로, 연주기량과 경험이 풍부한 연주자를 필요로 한다.
물론 악보의 모든 표기법을 따라 각 음표와 리듬을 정밀하게 배치하고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진정한 음악으로 완성하는 것은 이를 뛰어넘는 훨씬 어려운 과제이며, 극소수의 연주자만이 해낼 수 있는 도전이다.
특히 이 작품은 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음과 리듬으로부터 그 시상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특화된 예술가만이 가능하다.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은 이 음반에서 그것을 해냈다.
그녀는 음악에 자신의 숨결을 실어 이 작품을 그녀만의 고유한 것으로 승화시켰다.
도날드 리드 워맥 Donald Reid Womack
작곡가는 연주자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작곡가가 어떤 음악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연주자들은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작곡가는 훌륭한 연주자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 그만큼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의 가능성도 많이 열리게 된다. 2017년 가을, 박세연 연주자가 12현 산조 가야금과 25현 가야금 독주곡 두 곡을 함께 위촉하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내게 처음 요청했을 때 난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해태>와 <구미호>라는 한국 전통 신화에서 선과 악의 균형을 이루는 한 쌍의 작품이 탄생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빠르고 역동적인 테마에서 뿐만 아니라, 느린 테마에서도 여러 번의 다양한 멀티 테크닉을 요구한다. 까다로운 부분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어떤 부분에서는 미묘한 레이어드 음색의 질감과, 복잡한 리듬, 동시에 다양한 템포 변화까지 있어 연주자의 양손이 악기를 지속적으로 넘나들며, 마치 마법을 부리듯 복잡하고도 수많은 테크닉을 수행해야 하므로, 연주자는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기교적인 부분을 넘어, 연주자의 진정한 능력은 그들의 연주에서 드러나는 음악성에서 빛을 발한다. 훌륭한 연주자는 매우 까다로운 음표를 모두 정확하게 연주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만의 표현력으로 그 음표를 모두 음악으로 바꿔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박세연 연주자가 해낸 일이다. 그녀는 나의 작품 <해태>와 <구미호>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음악으로 만들어내 들려주었다. 단순한 음표가 진정한 음악으로 바뀌는 경험, 이것은 모든 작곡가가 진정으로 원하고 꿈꾸는 일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박세연과 함께한 것은 나의 특권이자 영광이었다.
가야금 연주자 박세연,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임준희 June-Hee Lim
박세연의 손끝으로 빚어내는 <젖은 옷소매>는 가야금의 뜯고 튕기는 터치 하나하나가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면서 동시에 다채로워서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답다.
이 작품은 한 여인이 베를 짜면서 자신의 깊은 상념과 시름을 베틀에 실어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곡인데, 박세연 연주자는 <젖은 옷소매> 내면의 깊이 있는 슬픔과 한의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잘 해석하여 때로는 청정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몰아감으로써 청중들을 순간순간 몰입시키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마치 도자기를 빚듯 오랜 시간 공들인 연마로 탄생 된 <젖은 옷소매>의 새로운 세계에 작곡가로서 깊은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